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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kimjaekyeong 2026. 6. 12. 00:37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라고 쓰고,
  신학을 모르는 이들에게라고 읽는다.
  • 원서 제목이 ‘A Little Exercise For Young Theologians’ 다. 틸리케는 이 소책자를 이렇게 표현한다. “조그마한 영성 연습서” 로 이해해 달라 요청한다.


  
  틸리케는 이 책을 엄격한 강의에 여담을 섞었다고 말한다. 강의에 참여하는 학생을 청중으로 생각하고 “경계를 풀고 솔직담백하게 수다” 를 풀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신학생의 영혼을 강의실이 아닌 설교단 앞에 입장 시킨 것이다. 이 문맥을 읽다 보니 한 사람을 떠올렸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인 구약학자 김회권 교수다. 내가 그의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 꽤나 충격을 받았다. 신학자로서의 모습 보다는 설교자로서 인식을 받았다. 뭐라 말 할 수 없지만, 아주 독특했다. 학기 수업 방식도 그렇고, 강의의 양식과 내용, 그 어느 것 하나 까지 파격적이었고 전통적인 수업을 해체하는데 앞장 섰다. 강의를 듣는데, 마치 설교를 듣는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 마저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전도적 강의로 그 시간을 온전히 몰입하는데 신경 썼다. 물론 내가 김회권 교수에 감명 받은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틸리케가 이 책의 정의를 설명하기 위해 “강단을 설교단” 으로 바꾸었다 말하는 부분은 정확히 김회권 교수의 교수법이다.

  미국의 루터교 신학자인 마틴 마티는 “신학적 자기 수련에 관한 교훈” 이라 불렀다. 또한 “틸리케가 신학을 관람하는 청중에게 던지는 방백” 을 갖고 있다 말한다. 앞서 김회권 교수의 강의가 연극에서 속삭이는 ‘방백’ 처럼 들리는 것이 똑같은 이치다. 신학이란 게 말라 비틀어져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영역인데, 살아 있는 연극 무대 속에서 방백의 환청이 들리게 한다면 이야말로 신학이 가지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신학 에세이다. 선배가 후배에게 권면하는 말에 가깝다. 틸리케는 신학이 갖는 오해나 편견들이 있는데, 여기서 솔직하게 밝힌다. 신학은 매혹적인 동시에 두려운 것이라 고백한다. 신학이란 말만 들어도 평범한 기독교인은 두려워한다. 수많은 경고가 벌써 뇌리에 파고 든다. ‘안 된다’, ‘~하지 말라’, ‘조심하라’ 같은 경고가 비수처럼 날아든다. 틸리케는 이러한 평범한 기독교인들이 두려워 하는 신학의 회의에는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권면한다.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순진한 걱정거리로 치부하지 말라고 말한다. 평범한 기독교인들도 나름 경험과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말한다.

  신학의 입문 부터 신학생과 기독교인들을 분리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단 한 학기만 마치고 돌아 온 신학생인데도 친구들 무리에서 달라진 위치를 발견한다. 성경공부를 하면, 그 옆에서 입꼬리를 끌어내린 채 앉아서 재단하기 시작한다. 단 한 학기만 배우고 왔는데도 수다쟁이로 변한 자신을 보게 된다. 최신 이론과 여러 해석, 갖가지 논란을 쏟아 내면 주위는 유식한 신학생에게 둘러 쌓여 공부를 인도해 달라 요청한다. 틸리케는 “경악스러운 재능” 이라 꼬집는다. 이 책이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다. 갓 입문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독설로 들린다. 철 모르는 신학생들이 가장 위험하고 가장 순결하다 이야기한다. 그 열정이 그를 그곳에 불러 세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틸리케는 그 병아리 같은 신학생들을 모아 놓고 벌벌 떨게 하는 소리만 하고 있다. 하나님 한 분 믿고 이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소명은 기를 꺾는 천둥처럼 들린다.

  틸리케가 경고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신학적 사고는 어떤 열정처럼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고, 마땅히 사로잡아야 하는 것” 이라 밝히지만, 헌신과는 다르게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사고가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한다. 틸리케는 이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시골 소년처럼 제 몸 보다 큰 바지를 입고 있는 것.. 이 젊은이가 그 바지에 어울리는 몸이 되려면 아직도 더 자라야 한다”, 영적 성장을 이야기한 것이다.

  신학을 말 할 때 토론 모임이 있는 곳이라면, 그게 어느 국가, 어느 대학이든 중요하지 않다 말한다. 토론에서 질문과 비판이 주어지는 순간, 그 모임의 ‘전문가’ 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달려 든다. 전문 용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를 한 전문가는 상대를 제압한 마냥 의기양양하게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사람들을 설복시켰다고 믿는다. 틸리케는 “충격 요법” 이지 설득 된 게 아니라 말한다.

헬무트 틸리케,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신학적 허영심을 병리적으로 해석한다. 오만한 태도를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쉽게 간파한다. 틸리케는 이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진리가 우리를 가진 자의 기쁨 같은 것으로 손쉽게 유혹하기 때문” 이다. 가진 자의 기쁨이 사랑을 죽일 수 있다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진리를 소유한 자의 기쁨이 사람들을 섬기지 않고 위에 서는 순간 사랑을 죽이는 형국이다.

  틸리케는 신학을 이렇게 표현한다. “신학은 결코 설교에 근거를 제공하는 바탕에 그칠 수 없고 오히려 설교와 동일한 시선을 가진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말하는데, 신학 강의에 참석했을 때, 마치 설교를 듣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 그때의 수업은 정말이지 강렬했다.

  성경에 창세기가 있듯 요한계시록이 있다.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도 신학을 거룩하게, 괴기하게 주제로 쓴 에세이가 있다. ‘신성한 신학과 마귀의 신학’ 이다. 틸리케는 신학을 신성한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 말한다. 신학은 양면성을 띠고 있어 신학을 하는 이들의 손과 마음에 달린 것이다.  

  “신학은 그야말로 인간이 하는 일이요, 수공업이며, 이따금 예술이기도 합니다”  

  (2023년 6월 12일. 최초 작성)